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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회복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유 1:20-21)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 (유 1:20-21)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의 마음의

갈망의 중심인 두 가지 항목을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서 회복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그분의 마음의 갈망의 중심인 두 가지 항목을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서 회복하고 계십니다."

  •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체험

  • 하나의 터 위에서

    교회 생활을

    실행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체험하고, 하나의 터 위에서 교회생활을 실행하는 큰 두 항목이 있습니다. 이 두 항목들은 수년 동안 잃어버렸거나 손상되었기에 주님이 회복하실 필요가 있는 것들입니다. ‘회복’이라는 단어는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거나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릴 때 쓰는 말입니다. ‘회복’이라는 명사는 손상 또는 손실이 발생한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복원하거나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들을 회복하신다는 것은 교회 역사에 걸쳐 그것들이 잃어버린바 되었거나 잘못 사용되었거나 부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회복이란 원래의 상태로 복원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틴루터, 진젠돌프 백작, 존 넬슨 다비,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지방 교회들은 수세기 동안 하나님의 회복의 일의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백성 중 어떤 이들이 반드시 본래의 그분의 의도를 관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본래의 의도를 지키지 않는 어떤 일들을 하도록 내버려 두실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현재 자신의 상황이나 전통적인 실행들만을 관심하고,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을 관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 주님의 회복 안에서 쓰임 받은 이들은 현재의 상태나 일들을 관심하지 않았고,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목적만을 관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목적

    회복은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사람이 단체적인 그분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그분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은혜 시대에 단체적으로 이 목표를 성취하도록 계획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구속이 필요했고, 하나님의 구속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손상되고 오염된 사람을 본래의 의도대로 복원시켜서 사람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는 믿는이들이 죽을 때 소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표는 그분의 영원한 목적의 성취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수세기에 걸쳐 교회가 하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래의 의도대로 교회를 회복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약에 계시된 교회의 실행들은 단지 역사적인 일일뿐 현재의 교회 실행의 표준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신약의 계시가 단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교회 생활의 실행을 지배하기 위한 표준이라는 것을 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관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의견에 맡기거나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길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성경의 계시가 복음과 구원과 합당한 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하여 표준이 되는 것처럼, 교회에 관하여서도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진리를 사람의 타고난 관념에 따르지 않고, 성경의 순수한 계시에 따른 구원의 진리를 분명하게 열어주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대한 계시와 실행 또한 역사적인 교회의 전통이나 타고난 사람의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경의 표준에 따른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이 시대에서 교회 생활의 실제적인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성경적인 길을 걸어간 신실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 교회의 역할

    하나님의 회복, 특별히 교회의 회복은 사람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 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하시는 것처럼, 그분은 불변의 계획을 세우시고 교회가 특정한 역할을 맡고 특별한 책임을 이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의 주권으로 그분의 표현을 얻기 위해 땅을 회복하시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분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 질 수 있는 천국의 실재 안에 사는 유기체가 되기를 의도하셨습니다. 천국의 축소판인 교회는 천년왕국 시대에 도래할 천국의 출현을 준비합니다. 또한 교회는 사탄과 모든 어두움의 세력 위에 그리스도의 승리를 집행하는 영적 싸움의 일을 수행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집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건축되어야 합니다. 우리 신랑이신 주님께서 다시 돌아오실 때, 교회는 주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신부로서 그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에 대한 그분의 표준을 낮추시지 않으실 것이며 교회에 대한 그분의 의도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의 건축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가 건축될 때, 시대는 종결되고 왕국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교회는 단지 그분의 계시를 따르는 것만이 아니라, 반드시 계시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은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마귀 사탄은 교회역사에서 개혁의 초기부터 회복을 극심하게 반대해왔습니다. 대적은 하나님의 회복이 완결되고 실질적인 교회 생활이 성취되어 그분께서 만족하실 때, 그 자신이 영원히 멸망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에 반대하는 악한 영적 세력의 대항은 너무나 맹렬합니다.

  • 회복의 예표

    회복은 단지 신약의 현상만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오늘날 하시는 회복의 예표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좋은 땅으로 들어가려 할 때, 주님은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그들이 선택한 곳에서 경배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으로 가야만 했습니다(신 12). 그들은 자신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들을 하지 못하게 제한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체적인 경배 장소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해진 때에 정해진 제물들을 갖고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 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오직 예루살렘 시온산에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하락하고, 특히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은 크게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넘어 갔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칠십 년 동안 노예살이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 것이 성취되도록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이 죽던 해, 바사왕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축하도록 허락하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분명히 말하기를 오직 소수의 숫자만이 되돌아 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 번제단을 세웠기 때문에 받은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재건축했고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집과 성의 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택하셨고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분은 예루살렘 성 안에 성전이 건축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이 알다시피, 택하심 받은 예루살렘 성 외에는 다른 곳에 성전을 건축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상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교회들이 여러 지방에서 세워져 건축되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에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이상과 합당한 교회 생활의 실행이 점차로 희미해졌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지방의 터 위에 있는 교회들 대신에 모든 종류의 교파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의 실지적인 표현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분을 만족시킬 교회를 갖기를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의 때부터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은 그분의 길에 따라 그분의 회복을 수행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교회와 교회의 실행에 관한 특별한 선택을 하셨고 그분의 뜻이 높여지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기를 계획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부분이 그분의 본래의 의도로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을 위하는 소수의 남은 이들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갖기로 계획하셨고, 주 예수님은 교회를 산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고,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각지에 지방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 이후에 교회는 하락하고 주님의 의도로부터 멀어져갔지만, 주님은 교회를 회복시켜 그분의 눈에 비정상적인 모든 것들을 정상으로 돌려놓고 계십니다.

  • 회복의 간략한 역사

    하나님의 회복은 20세기에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회복의 시작의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는 없지만, 종교개혁이 있었던 1517년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회복은 특정한 단계들을 거쳐 왔습니다. 종교개혁의 단계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진리가 회복되었습니다. 게다가, 성경은 일반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 분명히 나와 있듯이,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하게 수행하는 대신에, 여러 개신교 교파들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더 전진하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18세기에 주님은 진젠돌프의 인도아래 보헤미아(Bohemia)에서 교회 생활을 부분적으로 회복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 주님은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와 다른 이들의 인도 하에 있던 플리머스 형제회(Plymouth Brethren)를 일으키심으로 회복 안에서 큰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처음 형제회는 절대적이었고 그 당시 종교 제도에서 나와 세상의 허영을 버리고 주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단순히 형제로서 모였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이름 안에서 그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축복하셨고, 특별히 성경의 순수한 계시에 따라 수많은 소중한 진리들을 그들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형제회 내부에서 성경의 일부 교리적인 논쟁 때문에 분열이 있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수천 개의 작은 그룹들로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형제회는 몸의 하나를 잃게 되고 ‘참된 하나’ 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축복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몇몇 사람들을 일으켜 속 생명의 여러 진리들을 회복하심으로 크게 반응하셨습니다. 이들 중에는 제시 펜 루이스(Jesse Penn-Lewis)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가 있었고, 이들은 각각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진리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신 진리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20세기에 중국에서 그분의 회복을 위해 워치만 니를 일으키셨습니다. 워치만 니를 통하여 교회의 터에 관한 진리와 지방의 경계에 대한 진리가 회복되었습니다. 워치만 니는 중국과 극동에서 교회 생활의 진리들을 사역했고, 이러한 사역의 결과로 수백 개의 지방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회복은 과거 그분의 회복으로 부터 고립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서간 모든 분들의 어깨 위에 서있으며, 주님의 회복 안에서 열려진 모든 진리들을 풍성한 유산으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 플리머스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하늘에 속한 교회의 부르심에 관한 두 가지 항목과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하였다. 종파 조직이 잘못 되었음을 보았고,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만이 존재하며 교회는 사람의 의견이 아닌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에 의해 세워져야 함을 깨달았다. 형제회는 구약에 있는 여러 예표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났고 유대인들에 관한 성경적인 예언들과 교회에 관한 예언들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많은 출판물을 발행하였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학은 기독교 안에서 가장 높게 평가되고 있다.

      영적인 부분만 고려한다면 형제회의 운동이 종교개혁보다 더 유력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워치만 니는 형제회가 형제 사랑의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계3:7-13)에 부합했다고 했다. 존 넬슨 다비는 형제회에서 가장 뛰어난 교사였다. 최고의 영어 성경 번역중 하나가 다비가 번역한 것인데 그는 성경을 불어와 독일어로도 번역했다. 개혁시대에 루터가 성경을 연 것이 사실이지만 다비와 형제회를 통해서 성경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성경이 처음으로 열렸다. 형제회의 주요 인물들은 조지 뮬러(GEORGE MULLER), 윌리암 켈리(WELLIAM DELLY), 매킨토쉬(C.H.MACKINTOSH), 안토니 노리스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 코테스(C.A.COATES), 로버트 앤더스경(SIR ROBERT ANDERSON)등이다.

  • 오늘날의 회복

    오늘날의 회복의 항목들이 깊고 폭넓지만, 하나님의 경륜의 빛 안에서 우리는 간단히 두 항목으로 주님의 회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그분의 회복 안에서 두 항목을 회복하기를 갈망하십니다. 첫 번째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고 체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참된 교회 생활의 실행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노선 안에 있는 그분의 종들을 통해 굳게 닫힌 성경을 해방해 주시고,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진리를 보여주시며, 온 땅으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또한 말씀 안에 있는 진리의 깊이들을 열어주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에 대한 이해와 체험 안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모든 소중한 항목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교회가 없다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이 모든 소중한 항목들은 다 교회를 위한 것이며, 참된 교회생활을 산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이 회복하시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이나 교회에 관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분께서 회복하시고 계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누림과 합당한 교회 생활의 실행입니다. 이 두 항목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실지적으로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린 결과로 교회 생활이 산출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도록 풍성하시며, 바로 이 분께서 사람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거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오늘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과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분은 참으로 놀랍고 기묘하여 사람의 언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그분의 인격에 대한 누림과 감상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며 우리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간교한 대적 사탄은 수세기의 교회사에 걸쳐 많은 믿는이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는 믿는이들이 살아계신 한 분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많은 것들로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사탄은 심지어 성경적인 것, 선한 것, 율법적인 것들로 믿는이들의 주의를 돌려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교리와 종교의 전통에서부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매일의 누림이시며, 가장 사랑스럽고 달콤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풍성하신 그리스도 자신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현재의 회복의 첫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의 풍성의 누림의 회복입니다.

    두 번째는 합당한 교회 생활의 실행의 회복입니다. 단지 교회에 대한 교리나 교회 생활에 대한 이론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고, 주님 또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청사진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지만 청사진이 건축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청사진이 아니라 그분의 거처를 위한 실제의 건축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신성한 계시와 청사진을 따라 교회 생활을 실행할 부담을 주셨습니다. 교회 생활의 실행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교회의 전통을 보존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안에서 행하기를 추구합니다. 실제적으로 교회를 건축하기를 요구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교회가 지방들에서(localities) 각 지방 마다 한 행정으로 하나의 교회로 건축되도록 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이 땅 위에 교회를 확산하기 시작하신 분은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닙니다. 대적과 종교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건축과 교회의 확산은 계속되었습니다. 사실상 반대는 건축과 확산을 촉진했습니다. 주님은 음부의 문이 이길 수 없는 교회를 건축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마음의 갈망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계의 혼돈 가운데에서도 주님은 그리스도의 풍성의 누림으로 채워진 교회 생활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태초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믿는이들에게 모든 것이었고 교회 생활은 지방의 하나의 터 위에서 실행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누림과 교회 생활의 실행이 있는 태초로 되돌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회복입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교회들이 어떠했습니까? 처음에는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이해가 분명하다면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도 분명해 질 수 있고 왜 오늘날 우리의 갈망이 하나님이 신약에서 초대 교회들에 세우신 것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도 분명해 질 수 있습니다.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초기의 믿는이들은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했습니다. 한 도시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 안에서 함께 교회 생활을 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통 안에서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도 시대 바로 직후 초대 교회의 이 간증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생명 없는 가르침과 전통들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님은 잃어버린 것들을 점진적으로 계속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역사는 주님께서 처음에 일으키신 간증과, 그 간증의 손실과, 그 후의 수세기에 걸친 주님의 점차적인 회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 결론

    신약 시대에 걸쳐 주님께는 항상 이 땅 위에서 주님의 간증을 지킬 남은 자들, ‘나의 말을 지켰고, 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은(계 3:8)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때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영적 하락이 시작되고, 어둠은 중세 암흑시기를 거쳐 지속되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말씀의 빛과, 그리스도의 체험과, 교회 생활의 실행과, 심지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회복의 흐름이 밀려들어오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한 흐름 속에 소수의 신실한 성도들이 주님의 간증으로 서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회복의 일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들이 쌓아올린 것 위로 계속 건축해왔고, 회복은 크게 전진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회복은 찬란한 광명 안에 영광으로 충만합니다. 주님의 회복 앞에는 시온의 대로가 펼쳐져 있습니다. 앞 세대로부터 이어지고 전진된 회복의 모든 영적 유산은 우리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마지막 경주자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기 위해 태만하지 말고 회복의 일을 계속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점이나 주름이나 그 같은 것들이 없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엡 5:27) 서 있기를 원합니다.